[춘천사람들] 人_터_view-“꿈을 찾아 남한에 왔다” (1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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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_터_view] “꿈을 찾아 남한에 왔다”
춘천에서 살고픈 혜산 청년 김은혁 씨
김은혁 씨는 2016년 4월 양강도 혜산에서 강을 건너 탈북해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남한으로 왔다.
석사동에 있는 해솔직업사관학교를 방문했다. 해솔직업사관학교는 북한에서 온 20~30대 청년들의 직업교육과 정착을 돕는 기숙형 대안직업학교다. 학교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는데 자전거를 세우던 어느 청년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김은혁(22세) 씨였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다부지고 눈매가 선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인터뷰에 앞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 혹시라도 밝히기 싫거나 불편한 대목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실명을 써도 좋다며 시원스레 말한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왜 북한을 떠나 이곳에 왔을까?
“꿈을 위해 왔어요. 북한에서는 아무리 일을 해도 늘 배가 고파요. 돈을 벌고 싶어요. 집도 사고 장사 밑천도 만들고요. 중국에서 가장 천한 노동일을 해도 1년 정도만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중국으로 가서 신분을 속이고 일하는 북한사람이 많은데 걸리면 북송되고 감옥에서 지독한 고생을 해요.”
그는 국경도시 혜산에서 살았다. 압록강을 건너기만 하면 중국 장백 조선족 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이다. 길림성 장백현은 인구가 약 9만명에 달하는 큰 도시로, 20년 가까이 탈북과 밀수의 중심지였기에 혜산시는 단속과 통제가 매우 강한 곳이다. 해발 700m 높이에 위치한 고원지대라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다.
“2016년 4월에 강을 건넜어요. 4월이라 해도 살얼음이 있어요. 강을 헤엄쳐 건너왔어요. 그때는 군대에 있었는데 부대를 이탈하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강둑길에는 50m 간격으로 경비초소가 있고 철조망이 있어 삼엄했어요. 목숨을 담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강으로 내려와 빨래를 하거나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으려 해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간혹 이렇게 사소한 일로 걸리더라도 감옥에서 며칠을 보내야 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였다. 아버지는 6살 때, 어머니는 9살 때 돌아가셨다.
“다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세 살 위 누나는 약사와 결혼했는데 매형이 돈을 못 벌어요. 그래서 누나가 쌀장사를 해요.”
북한에서 약사는 그저 노동자일 뿐이다. 겨우 배급이나 나오는 정도고 월급은 있으나마나 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직업선택은 본인의 의사보다는 당과 행정기관의 조정·통제에 의해 각 부문별 수요에 따라 중앙의 총체적인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직장배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판단기준은 성분과 당성이라는 정치적 기준이다.
“저는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을 다니고 입대를 했어요. 대학을 가려면 큰돈이 드는데 가난해서 진학은 엄두를 못 내요. 그리고 남자라면 군대를 가야 해요. 북한에서 남자는 1순위가 입당인데, 그러자면 군 입대는 필수적이에요. 가장 큰 명예이자 자부심이에요. 대학을 안 가고도 기술을 익히면 출세할 수는 있어요. 북한에서 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적은 편인데, 당성과 계급이 확실해서 사실 출세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에요. 대학을 가는 사람도 극히 일부고요.”
그는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왔다. 은혁 씨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게 지독히도 싫었다. 배곯기 일쑤였고 중국에서 일하다 북송되는 것도 두려웠다. 남한이 그저 잘 산다는 소문은 들었다고 했다. 대도시를 제외한 지방에서는 남한 소식을 접할 기회가 없단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사정 악화로 인해, 그리고 외국체류 중 북송위험을 느낀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입국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2007년 2월에 1만명이었던 북한이탈주민 수는 현재 3만명을 넘어섰다.
“평양시민은 아무나 될 수가 없어요. 고위직이나 간부들이 살고 그들은 대학도 가고 유학도 간다고 해요. 돈이 많으니 핸드폰도 있고 하겠지만 다른 지방은 어림없는 일이에요. 우리 같이 계급이 낮은 노동자 월급과 배급으로는 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사람들은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에요.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준비했어요. 탈북한 뒤 중국에서 몇 개월 일해서 번 돈을 누나에게 주고, 남한 브로커를 만나 정착금을 담보로 남한에 왔어요.”
화천 하나원에서 3개월 교육을 받고 김포에 주거지가 마련돼 그곳에서 멀지 않은 아크릴 공장을 다녔다. 재생 아크릴을 받아 여러 가지 가공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일이 세심하고 정교한 부분이 많아 실수도 있었고 자동화 기계설비가 많아 기계를 다루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전의 직업이 적성도 안 맞았지만 그렇게 단순 노동자로 살기는 싫었다. 그러다 하나원에서 만난 북한친구로부터 해솔직업사관학교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고 사감을 통해 입학하게 되었다.
“하나원 생활 3개월은 남한 생활에 필요한 간단한 법규나 지하철 타는 법 등을 배우며 적응 훈련을 받았어요. 이곳에서는 용접과 배관, 에너지 관련 기술을 배우고 있어요. 북한에서 받은 교육과정을 인정받아 검정고시과정이 없이 지금은 폴리텍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북한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해요. 북한에서도 의사나 교수가 선망 받는 직업이기는 한데, 교육과정에서 내 적성에 따라 교육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 하는지도 잘 몰라요.”
이달 열린 해솔직업사관학교 운동회 때 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있는 김은혁 씨. 사진=해솔직업사관학교
북한주민들의 직업선호도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당·행정관료 등의 직업을 선호했지만, 근래에는 시장이 지방으로까지 확산돼 북한주민들 사이에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외화벌이가 가능한 외교관, 무역일꾼, 외항선 타는 선원, 부수입이 많은 서비스업 부문에 배치되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해솔학교 선생님이 은혁 씨를 안내해주며 “우리 아이들은 책 한 권은 그냥 나온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스무 살도 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사선을 넘어 꿈을 찾아왔으나 혹독한 고독과 두려움 속에 던져졌다.
“저는 김포에 집도 있으니 어찌 보면 꿈을 이룬 건데, 그럼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아요.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모든 것을 혼자 계획하고 결정하는 일이 힘들어요. 북한에서는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는 경쟁에 이겨야 하고 사람들은 비교하고 차별을 해요.”
김기찬 상임이사는 은혁 씨가 “속이 깊고 생각도 반듯하고 의지가 강한 친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돈을 많이 벌어 누나와 조카들을 데려와 남한에서 같이 살고 싶어 한다고도 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는 미지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북한이탈자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파도와 싸우는 중이다. 남한사회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왔다가 사회문화적 괴리감에 좌절하고 또 다른 이산가족의 고통에 직면한다. 그들에게 통일은 멀기만 하고 생존은 엄중하고 냉혹한 현실이다.
“그래도 저는 이곳을 알게 되어 다행이에요. 이곳에서 대학을 마치면 춘천으로 이사 올 생각이에요. 춘천에 정착하고 싶어요. 이곳은 취업 후에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상의할 선생님들이 계시고 재교육을 받을 수도 있고 가족 같아요.”
이곳 출신의 청년들은 학교나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선생님들은 일자리를 먼저 알아보고 적성에 맞는 학생에게 맞춤교육을 시키고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두를 ‘패밀리’라 부른다.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만의 기술과 경쟁력을 갖추도록 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한 엄마의 품 같은 세심한 배려가 이곳 민간단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탈북자들의 자살률은 일반 국민의 3배에 달하며, 남북하나재단 설문 조사에선 응답자의 52.9%가 불안이나 우울함에 대한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실업률은 평균보다 4배가 높고,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탈북자가 사기범죄에 피해를 당한 비율은 23.4%로 우리나라 전체 사기 피해율(0.5%)보다 46배나 높다. 북한주민 인권에 대해서는 말을 해도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인권문제는 국가안보를 핑계로 입을 닫는다. 탈북민의 사회참여 활동은 전체 20%가 조금 넘는다. 대부분 종교활동이었다. 그들은 각자도생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에게 필요한 것은 정착금만이 아니다. 남한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건강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사회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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