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탈북청년의 페스탈로치…"기술교육은 사회정착의 밑거름"(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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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자 세계일보에 김영우 이사장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탈북청년들을 위해 지금껏 걸어오신 감동의 스토리를 감상보시기를 바랍니다. ^^
“탈북 청년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자립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온 탈북민 수가 3만명을 넘어섰다. 한국 사회에 정착해 맘껏 자유를 누리고 경제적 신분 상승을 이룬 탈북민이 적지 않다. 하지만 많은 탈북민이 가치관 혼란 등으로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김영우(68) 해솔직업사관학교 이사장은 직업이 없어 앞길이 보이지 않는 20∼30대 탈북 청년들을 위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기술만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이라며 탈북 청소년의 기술 교육에 온몸을 던지고 있는 그를 주변에서는 ‘탈북 청년의 페스탈로치’라고 부른다.
김영우 이사장은 지난 6일 “탈북 청년들에게 남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지원금보다는 평생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해솔직업사관학교 출신을 채용한 원익그룹이 추가 채용의사를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기부금까지 낼 정도로 기술교육 효과를 보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 이사장은 “해솔직업사관학교가 탈북 청년들의 건전한 사회생활을 돕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이재문 기자 |
김 이사장을 지난 6일 서울 서소문로 한국외환은행 동우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평생을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법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3개월 만에 군에 입대했다. 주변 친구들이 대학원 등에 진학해 고시 공부를 계속한 것과는 달리 김 이사장은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한국외환은행에 특채로 들어갔다. 당시 외환은행은 명문대 상대, 법대, 문리대 학생을 특채로 채용했다. 김 이사장이 외환은행을 택한 또 다른 이유는 군대 복무기간에 월급을 지급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복무기간 월급은 고스란히 시골집에 보내졌다. 입대할 때는 제대하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만 복무기간에 월급을 받아 3년을 근무해야 하는 데다 인사부 등 주요 부서에서 근무해 평생 은행원으로 눌러앉았다.
김 이사장은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인사·기획 등 핵심 부서에서 잔뼈가 굵었다. 책임이 컸지만 그만큼 보람도 많았다. 김 이사장은 훗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기회를 맞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점 근무를 마치고 세계전략팀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97년 한국형경수로 사업으로 북한 함경남도 신포에 외환은행 지점이 설립되면서 초대 지점장으로 자원했다. 김 이사장은 북한 근무가 진취적이고 도전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자원했다.
김 이사장은 “북한에 가서 근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인사담당 이사 등이 놀라서 가족과 상의해 최종 의견을 밝혀 달라고 얘기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고, 인생을 보람 있고 풍요하게 하는 모멘텀이 됐다”고 회상했다.
경수로 건설 현장에서 5㎞쯤 떨어진 캠프에서 생활한 김 이사장은 북한 주민들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 실상을 목격했다. 2500여 만명의 북한 주민이 굶는 현실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남한에서 파견 나간 근로자들이 먹다 남은 통조림을 조각장에서 태우는데 고기 냄새를 맡은 인근 마을 개들이 불구덩이로 달려드는 것을 봤습니다. 사람도 먹을 것이 없어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지만 가슴이 먹먹했죠.”
2년 가까이 북한의 현실을 가감 없이 목격한 그는 그때 북한 주민을 위해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그는 은행 내 수석부장인 종합기획부장을 맡았다. 임원 승진이 눈 앞에 보이는 보직이었다. ‘호사다마’라고 이때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닥쳐왔다. 평생 믿고 의지한 아내가 암에 걸려 투병을 시작했다. 앞날이 보장된 자리였지만 그는 휴직계를 내고 아내 곁을 지켰다. 병마와 싸우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그는 퇴직하면 고아원을 만들어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고 약속했다. 복직한 그는 상무와 부행장으로 승진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2003년 11월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매각되자 곧바로 사표를 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은행원 30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
김 이사장은 아내와 봉사인생을 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곧바로 강남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다. 애초 약속대로 고아원을 만들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며 살 생각이었지만 기존 고아원이 아이들이 없어 정원의 70%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생각을 접었다. 이때 그의 머리에는 자유와 배고픔에 굶주린 북한 주민이 떠올랐다. 그는 남북문화통합교육원 이사와 이사장,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셋넷학교’ 운영위원장, 무지개청소년센터 감사 등을 맡으면서 탈북 청소년을 도왔다. 그는 기획부서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대안학교 운영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온 힘을 다해 봉사했다. 퇴직금과 사재를 털어 이들 학교와 기관을 후원했다. 평생 모은 돈을 탈북주민을 위해 썼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크리스찬으로서 어긋나지 않은 성품을 갖고 진솔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큰 의미를 뒀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내의 죽음을 겪으며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탈북주민을 도왔습니다. 북한에서 근무하며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던 주민들의 실상을 본 것이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전 재산을 들여 지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아마 북한 실상을 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는 탈북 청소년들이 여러 기관의 산발적인 지원에 의존하다가 끝내 적응에 실패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했다. 예산만 낭비하고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탈북민 지원방안 개선 필요성을 실감했다. 기초 실력은 쌓지 않은 채 검정고시 하나만으로 대학을 지원하고, 그 뒤 대학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거나 사회에서 도태되는 사례를 무수히 보면서 새로운 교육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술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 내놔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탈북주민 중 사각지대에 놓인 20∼30대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들을 제대로 교육해 한국 사회에 적응시킬 경우 사회적 비용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한국 사회를 찾은 진짜 이유인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20014년 1월 강원도 춘천에 탈북청년 기술학교인 해솔직업사관학교를 열었다. 대학은커녕 취직을 못해 방황하는 탈북 청년에게 평생 생활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사회에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직업학교를 개교했다. 학교 문을 열기까지 그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춘천에서 혼자 10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아냈다. 학교부지와 기숙사를 마련하느라 밤낮없이 쫓아다녔다. 탈북청년 3명으로 시작한 직업학교는 5년 만에 청년 학생 30명과 교사 10명, 자원봉사자 15명이 있는 반듯한 교육시설로 자리 잡았다. 매년 6억3000만원씩 들어가는 운영비는 통일부와 강원도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고 있다. 모자라는 부분은 개인 후원자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이마저도 부족할 때가 태반이지만 탈북 청년들을 사회에 당당하게 배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학교 설립 초기에는 일정기간이 안 돼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고 학교를 설립하도록 도움을 주겠다던 강원도도 지원 근거가 없다며 예산지원을 꺼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3년이 지나면서 통일부로부터 대안학교 형태의 지원금을 받고, 조례를 만든 강원도로 부터 매년 운영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부족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아산나눔재단으로부터 3년 동안 지원받은 5억2000만원이 학교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틈만 나면 후원자를 만나고, 외부 강연비나 상금 등을 받으면 전액 학교 통장으로 입금한다. 탈북 청년들에게 최고의 숙식을 제공하고 양질의 교육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을 늘 고심하는 그의 소망은 해솔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당당하게 사회인으로 정착해 제몫을 하고, 가정을 이뤄 생활하다 통일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해솔학교는 장기적으로, 한곳에서, 개인 맞춤형, 종합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재학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탈북 청년들은 평균 3년간 이곳에서 지내며 기술을 익힌다. 탈북 청년의 건강·심리치료, 기초학습, 진로·적성찾기 등을 통해 맞춤형 기술교육을 한다. 기초 실력이 부족한 청년에게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친다. 이 과정을 마치면 전문대학이나 폴리텍대학에 진학시키거나 전문학원에서 기능사 자격을 취득시켜 사회에 내보내는 로드맵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학비를 받지 않는 이 학교는 학생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매월 20만원의 생활비를 준다.
김 이사장은 “우리 학교는 해솔패밀리입니다. 단순히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가 아니라 한가족입니다. 청년들이 취업하면 회사에 찾아가 이들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고 완전하게 자리를 잡고 생활할 때까지 공동으로 관심을 갖고 도와준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학교를 신축하는데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다. 30명의 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교실과 기숙사 신축을 준비 중이다. 실력 있는 젊은 건축가의 건물 설계까지 마친 상태다. 내년 3월 착공해 12월 준공할 계획이다. 신축비 24억원 중 강원도 지원금 10억원과 후원자 기부금 4억원을 마련했지만 나머지 10억원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자유 하나만을 위해 남한 사회를 찾은 탈북청년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사회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오늘도 기부자를 만나 학교 설립취지를 설명하느라 비지땀을 쏟고 있다.
출처: 세계일보 박연직 선임기자 (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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